(제목의 어그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글을 읽고 나시면 제목에 담긴 뜻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날은 매우 바쁜 날 외근 스케줄을 짤막하게 쪼개 만든 귀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역삼동 자보 선생. 그러니깐 약 4년간 인생 내비게이터로 나의 이름, 남편과의 인연, 아이와 만나는 날, 심지어 아이의 이름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 중 참 많은 날들을 의존한 역술인, ‘참사주’ 사무실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긴박하게 문자로 그의 출타를 확인하고 똑똑, 들어가 홀린 듯 하반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진년에 값진 삶 살 수 있을지 내 입에서 줄줄 질문이 나왔다.

선생은 더워서 그런지 흰색 마 소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성긴 머리와 깊은 눈매를 지닌 사주 선생은 ‘이건 요로코롬 저러코롬 이러니까네 저래해라’, ‘야 이거 내밖에 말 몬해준다’ 등등 오랜 역사의 전문 지식을 풀어냈다.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흘깃 시계를 보니 상담시간이 10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선생은 번호로만 이루어진 발신전화를 흔쾌히 받았다. 상대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선생님, 발주 물량이 지금. 아, 이게 안 될 거 같은데.” 선생이 난색을 표했다. “그러니까네. 지금 1,000장을 우선 넣어. 내 믿고 진짜 넣어.” 무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양새였다.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책상를 두고 우두커니 3평 남짓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 귀가 커지려 했다. “그러니깐, 빨간색 티팬티로 1,000장이고 실크 재질 맞죠?”. 그때, 누가 감각의 크기를 보는 현미경으로 나를 봤으면 내 귀와 눈이 선생님 머리만해졌을 것 같다. 익숙한 듯 선생은 “그래요. 그게 재질이 면이랑, 응응. 핑크도 넣어줘. 핑크도 실크. 가운데 레이스 들어간 거 그거 맞지”.라고 상대를 재촉했다. 왠지 갑자기 시간이 아주 처언처언히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은 그제서야 상담 의뢰인이 앞에 앉아 있는 걸 눈치 챘다. 갈 길을 잃었던 내 눈동자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수기 돌아가는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내 귀는 정상 작동 중인 게 분명했다. 갑자기 사무실이 덥게 느껴졌다. 아, 선생의 마소재 옷이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 더 궁금한 건 없고?” 예전 같았으면 챗GPT만큼이나 궁금증을 줄줄이 사탕만큼 마냥 밀어 넣었을 테다. 상담료의 뽕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물어본 걸 또 물어보고, 또 확인했던 나다. 빨리 일어서야 할 것 같았다. 선생이 갑자기 자녀 계획을 물어보며, 내가 좋은 비방(秘方)을 알려 준다며 티팬티를 사서 베개 밑에 넣으라고 말할 까봐 겁이 났다. 오늘따라 물어보지도 않은 손녀며 손자 이야기를 시작한 선생을 보고 있으니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손하게 말하니, 그제서야 선생은 방긋 웃으며 올해 상담료가 올랐다고, 단골들에게 저렴히 받았는데 더 이상은 어렵다며 계좌번호를 들이 밀었다. 빨리 켜져라, 은행앱아. 일해라, 5G. 톡톡톡. 계좌번호를 입력했다. 음. 상대의 계좌명이 선생 이름이 아니었다. OOO와코루 상사. “이게 맞나요?” 조심히 여쭈었더니 선생은 “네, 맞아요”라며 내 손가락과 화면을 인자한 웃음으로 보고 있었다. 파란색 버튼의 계좌이체 버튼을 누르니 손가락에서 나온 땀이 지문처럼 화면에 남았다. 화면이 툭 꺼지자 위험을 감지하려는 내 눈과 내가 마주쳤다.

당연하게도 아무일도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아주 밝게 인사하고 그 길로 나와 OOO와코루 상사를 검색했다(검색이 일이다. 어려움 없다). 사업자등록번호와 회사 주소지까지 확인했다.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의류 유통 회사입니다”라는 안내문이 기업소개에 걸려 있었다. 내가 선생에 대해 아는 오랜 경험은 역학과 명리학 40년 외길 인생뿐인데, 갑자기 빨간색 티팬티 실크 소재 1,000장은 마치 40년 순두부 장인이 어느 날 체리맛 마카롱을 판다는 것과 같았다. 유독 더웠던 사무실, 자꾸 타는 목, 정수기의 소음, 선생의 흰색 마소재의 상의, 손수건으로 연신 닦는 얼굴 그리고 천천히 흐르는 시간.

강렬했던 기억은 무더위만큼이나 맹렬하게 각인되어 급기야 ‘사주-티팬티’ 사업 가능성까지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즘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OO철학관 이전 및 신사업 론칭 안내문> … 아울러 함께 전할 희소식은 본인의 오랜 경력을 토대로 여성 언더웨어(브라, 팬티, 거들 내의 등) 분야에 브라운 OO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하였사오니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내방하시어 사업 설명을 들을 계획을 갖기 바랍니다. 여성 프리미엄 고급 언더웨어로서 품질로 가격면에서 … 동제품은 이 커머스 쇼핑몰 판매를 위한 비전을 가진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 소수만 모집하고 있사오니 … 관심 바라며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원해야 할 건 의뢰인들의 건강과 행복이 아닌 사주 선생의 티팬티 사업이렸다. 둘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날의 기묘한 경험과 에피소드는 예민한 몸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실체를 온몸으로 겪기는 어렸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