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의 증거가 되어 줘. 거의 모든 시간에 대한.

빛을 등지고 빛 속으로 걸어가자.

내가 아는 우리의 미래는 바로 그런 거야."

📖 김이슬, 하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며칠 전 랑이와 한강 공원을 달렸다. 이번이 세 번째 달리기다. 처음에는 3km, 두 번째는 5km. 이날도 5km를 달리기로 했다. 러닝을 하는 날이면 랑이는 우리 집에 온다. 랑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오늘은 운동 패션이 좀 튄다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좋다며 웃었다. 나는 올블랙으로, 랑이는 연노랑의 얇은 바람막이와 라임색 바지를 입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계단이나 바위에 다리를 올려서 몸을 푼다. “뛰기 전에는 허벅지 뒤에 붙은 근육을 풀어주는 게 좋대.” 어디선가 본 스트레칭을 서로 따라 하면서 다리 근육을 쭉쭉 늘렸다. 하체부터 상체, 어깨와 목을 지나 손목과 발목까지. 스트레칭을 끝내고 발을 툭 툭 털면 달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랑이는 달리면서 들을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고 나는 어디까지 찍고 돌아올지 전환점을 확인했다. 힙한 DJ 음악, 최근 꽂힌 뉴진스와 에스파 앨범, 우연히 추가한 느린 비트의 팝송, 평소 자주 듣는 밴드 음악이 섞인 혼란의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랑이는 내 운동 메이트다. 지난 2월 말쯤, 꾸역꾸역 다니던 PT가 끝나고 무기력하게 늘어진 나에게 랑이는 헬스장을 끊으라고 말했다. “24시간 가능한 곳이면 좋은데 사실 아니어도 괜찮아. 6개월도 좋은데 가격 생각하면 1년으로 끊게 되더라. 헬스장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언제든 갈 수 있잖아. 헬스장 끊고 나랑 운동 인증하자.” 그날 이후로 우리는 운동할 때마다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헬스장 거울 셀카, 러닝 기록 캡처 이미지, 천국의 계단을 걷는 발, 러닝머신 모니터에 비친 눈, 텀블러, 요가 매트… 어느 날에는 집에서 플랭크를 하고 있다며 손등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뜬금없이 카톡에 올라온 인증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뭐든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나 희망 같은 것도 느꼈다. 운동을 하지 못한 날에도 그랬다. 사진 속 땀에 젖은 머리를 모자로 푹 눌러쓴 랑이를 보며, 느리지만 조금씩 발을 뻗어나가는 담쟁이 식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도 운동을 해서 랑이에게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망원 한강 공원에서 출발해 상수역 근처 강가까지 갔다가 다시 망원으로 돌아왔다. 5km 러닝이 끝난 후, 우리는 열띤 얼굴로 이번 달리기가 지난번보다 훨씬 수월했다고 감탄했다. “기억나? 처음에 뛸 땐 3km도 힘들었잖아.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운동을 했으니까 이렇게 거뜬하게 뛸 수 있는 것 같아.” 랑이의 들뜬 목소리에 그동안 나눈 인증 사진과 카톡이 내 머리를 스쳤다. 돌이켜보면 그 속에는 어떤 의무감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잘하고 있다는 격려, 무리하지 말자는 당부, 어제는 못 했지만 오늘은 했다는 대견함이 있었다. 오늘의 거뜬함이 유난히 귀하게 느껴지는 것도 불안이 아닌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기쁨을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변화를 목격하고 증명하는 이 관계 속에서 너와 나는 얼마나 더 건강해질까. 얼마나 더 뻗어나갈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서 걷는 랑이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가 10km 마라톤을 완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문득, 랑이가 나에게 물었다. “다음엔 언제 뛸까?”